사진술에 빛의 연구를 더하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시선뉴스 박진아, 이지혜 / 디자인 이연선]
▶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
▶ 출생-사망 / 1800년 02월 11일 ~ 1877년 09월 17일
▶ 출생 / 영국 도싯 주
▶ 활동분야 / 사진, 과학
‘칼로타입(calotype)’을 확립함과 더불어, 이를 보급시키기 위해 최초의 사진 인화소를 설립하였고, 잠상을 현상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받는 등 개척자의 면모를 보였던 사진가 겸 화학자.
- 수학과 과학연구에 빠졌던 탤벗, 빛과 화학물질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한 노력
탤벗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비교적 풍요로운 집안에서 자라왔다. 그는 1817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4년간 재학했는데 그 시기에 1820년 고전 분야에서 포슨 상 수상, 1년 뒤인 1821년에는 수학 트라이포스 시험에서 12번째 랭글러로 선정되는 등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처음에 수학을 깊이 대해 연구하며 1822년부터 2년간 6편에 달하는 논문을 썼고, 1831년에는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는가 하면 1838년에는 왕립학회에서 로열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1824년부터 탤벗과 같은 대학 출신 존 허셜과 함께 광학 연구에 몰두하며 태양광선과 유사한 스펙트럼을 가진 화학물질을 찾고자 했다. 탤벗은 물질을 태우는 과정에서 색을 분류했으며 각각의 색이 화학물질의 특성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1831년 한 조찬 모임에서 백금염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얻은 그는 은염을 이용한 실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 과학 개혁과 정치에 많은 관심...장관을 지내다
탤벗은 영국 과학의 개혁 운동에 동참한 바 있다. 1830년대 배비지는 ‘영국 과학의 쇠퇴와 그것의 몇 가지 원인에 대한 반성’을 발표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탤벗은 “과학이 국가의 명예와 부를 증강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함에도 국가는 직접적인 보상을 하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정치에도 촉각을 세우고 있던 그는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휘그당을 지지했다. 이에 따라 1832~1835년까지 그는 월트셔 주의 윅셔너리를 대표하는 하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이어 1840년대에는 월트셔 주의 장관 자리를 지냈다.
- 신혼여행 중 아이디어 얻은 탤벗, ‘포토제닉 드로잉’ 발명 성공
하원 의원이 되기 바로 전에 탤벗은 콘스턴스 먼디와 결혼하여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1833년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하다 자연의 이미지를 스스로 새겨 종이 위에 고정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이에 따라 그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실험을 시작한다.
질산은 종이로 실험을 진행하던 그는 연구 끝에 1835년 가장 기본이 되는 사진술 ‘포토제닉 드로잉’ 발명에 성공한다. 이는 종이로 풍경 등을 재현하는 기술이었으며 질산은에 담근 종이에 태양 광선을 받은 부분만이 어둡게 변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흰 종이를 은의 질산화물 용액에 담가 사용했다. 이어 종이를 투명하게 만들어 똑같은 사진을 복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발명에 대한 기술적 가치를 확인하다
1839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종신서기인 아라고는 ‘다게리오타입’이 발명됐음을 밝혔다. “유명한 디오라마 화가 다게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려진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탤벗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일전에 발명한 것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미지 보존 방법이 유사했던 것. 이후 그는 자신의 발명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포토제닉 드로잉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1839년 포토제닉 드로잉을 다룬 특별 전시회를 열었고, 그 후에도 ‘포토제닉 드로잉의 기술, 또는 화가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연물을 그리는 과정에 관하여’를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리터러리 가제트’, ‘포토제닉 드로잉’ 등의 기사를 송출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연구, ‘칼로타입’의 발명으로 이어지다
포토제닉 드로잉은 노출 시간이 30분이나 소요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다게레오타입이 3분 안에 같은 일을 수행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비교적 오랜 시간인 셈. 탤벗은 포토제닉 드로잉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가속물질에 대한 고민에 빠졌고 그 결과 1839년 노출시간을 줄이는 감광지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가 브로마이드 종이에 갈릭산 용액을 첨가해 종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더불어 탤벗은 같은 해, 태양광선으로 인해 들뜬 상태가 된 은염을 잠상이라 칭하며, 다게레오타입에서 수은 증기가 잠상을 보이게 하는 작용인이 된다고 밝힌다. 그는 수은증기 대신 전기의 작용을 강조하였고 이듬해에도 그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그 결과 탤벗은 사진을 보다 선명하게 현상하는 기술을 알아냈고 이를 ‘칼로타입’이라고 명명했다.
칼로타입은 한 마디로 포토제닉 드로잉과 현상 과정이 합해진 것으로, 감광지를 태양광선에 잠깐 동안 노출시킨 후 나머지는 현상과정으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다게레오타입보다 2분 빠른 1분의 시간만을 필요로 했으며 같은 사진을 여러 장으로 복제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칼로타입 발명 이후 탤벗은 그 원리는 설명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그저 개인의 성과로 치부되었을 뿐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다. 1844년, 그는 리딩의 베이커 거리에 사진관을 차려 자신의 기술로 다양한 사진을 만들어냈고 ‘자연의 연필’이라는 사진집을 발간한다. 7,200장에 육박하는 사진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세계 최초의 상업화된 사진집이라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탤벗의 노력으로 이제까지 많은 이들이 사진을 통해 소중한 추억을 담아왔다.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마련되기까지 탤벗의 노력이 많은 공헌을 한 바, 그의 위대한 업적이 후세에도 길이길이 기억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