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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인포그래픽]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맞선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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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이연선]

▶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 출생-사망 / 1483.11.10. ~ 1546.2.18.
▶ 국적 / 독일
▶ 활동분야 / 종교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과도한 권위를 무너뜨리고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다.


- 하늘의 무서움 느끼며 종교자의 길로
마르틴이 법률 공부를 하던 대학시절, 그는 어느 날 무시무시한 벼락이 자신의 바로 옆에 떨어지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그 순간 마르틴은 하늘과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범접할 수 없는 무서움과 그 이면에 어떤 경건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르틴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로 들어갔다.  

- 돈으로 면죄부를? 부당함에 정면 도전
그렇게 수도자의 길을 걷던 마르틴은 교회의 모습에서 부당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돈을 받고 죄를 면제해주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 이에 1517년 마르틴은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돈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문서를 공개했다. 당시 교회의 권위가 철벽같았던 터라 마르틴은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르틴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의 변화를 확고하게 주장했다. 그렇게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이상하게 갈등이 고조 될수록 마르틴의 주장은 외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공감을 얻고 추종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 로마 교회로부터 추방, 더욱 굳어진 신념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서부터 마르틴의 눈에는 교회의 부당함이 하나 둘 더 보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교황과 언쟁을 수차례하며 점점 교회의 눈에 불편한 이단아로 보이게 되었다. 특히 마르틴은 교회의 권위에 맞섰는데, 로마 교회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현상을 꼬집기 시작했다. 심지어 교리보다 자신의 주장이 더 기독교 적이라 주장 하며 로마 교회의 법전을 불에 태우는 퍼포먼스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교황은 분노가 극에 달했고 결국 교회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게 되었다. 마르틴은 ‘유료 면죄부 등 잘못된 부분을 고쳐가는 것이 교회를 위하는 것인데..’라며 납득하지 못했고,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건히 했다.  

- 보란듯이 행한 금지된 결혼...후세에 이어져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던 마르틴은 결국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다. 마르틴의 결혼은 그와 함께 종교 개혁의 길을 걷던 동료들도 ‘사탄이 비웃을 것’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마르틴의 이마저도 성서의 잘못된 해석이라며 결혼해 아이를 낳고, 배우자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오히려 사탄에 대적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야 ‘종말에 하나님이 오면 많은 이간이 그 자리를 사탄으로부터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말이다. 결국 그는 전직 로마 가톨릭 수녀와 결혼했고 이후 성직자들의 결혼이 당연시 되었다.

이처럼 종교의 불필요한 권위에 맞서온 마르틴 루터는 종교 혁명의 정신을 이어가고 여러 분쟁을 몸소 막아내다 63세의 나이에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눈을 감았다.


혹자는 마르틴 루터를 두고 고집쟁이에 비이성적인 종교 개혁자라 평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부당함에 맞섰고, 틀에 갇힌 종교적 해석을 유연하게 바꾸어 이후 종교 개혁에 큰 힘이 되게 했다는 점이다. 특히 신이 아닌 교회와 교황을 섬기는 것과 그로인해 그들이 부리는 권력에 대응 했기에 후세에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