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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삼국을 통일해 통일 신라를 이룩한 사람 중 으뜸공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김유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은 태종무열왕(김춘추)와 함께 당과의 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켰고 고구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인물이다. 김유신이 신라의 최고 권력가가 되는 데에는 김유신의 치밀한 인생설계가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 알아보자.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서현과 만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유신의 집안은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으로 진골 귀족 가문으로 편입되긴 했지만, 폐쇄적인 신라의 계급체계상 신라 본토에서 오래도록 권세를 부리던 토종 진골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통 진골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대부터 아버지, 그리고 김유신까지 각종 전투에서 탁월한 공훈을 세워 신라의 군사권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군사권을 가지고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분에 의한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던 김유신에게는 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필요했다. 때문에 김유신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김유신은 정통 진골인 김춘추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누이와 결혼을 시키는 묘책을 생각해 냈다. 함께 축국(공차기)를 하면서 어울리다가 옷고름을 일부러 밟아 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이를 고쳐준다는 명분으로 집으로 데려와 술을 먹이기 시작했다. 김유신에게는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보희, 둘째가 문희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즈음 김유신은 누이들에게 김춘추의 옷고름을 고치라고 했는데, 보희는 망측하다며 거부했고 문희는 김유신의 말을 들었다. 문희는 김춘추의 옷고름을 고치게 되었고 김춘추는 이런 문희의 모습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 했고 결국 문희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일이 이렇게 되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춘추가 문희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혼인을 맺기에는 김춘추의 신분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이렇게 김춘추가 혼인에 대해서 망설이자 김유신은 하나의 쇼를 기획하게 된다. 그는 그의 여동생이 혼인 전에 임신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며 그녀를 화형 시키기 위해 장작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근처를 선덕여왕이 지날 즈음 불을 붙여 연기를 냈는데, 지나가던 선덕여왕은 김유신의 집에서 불길이 치솟자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선덕여왕은 친히 중매를 서 김춘추와 문희를 혼인시켜 버렸다. 김유신의 뜻대로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혼인은 결론적으로는 추후 김유신과 김춘추 서로에게 매우 큰 힘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춘추는 당시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진골 귀족들에 의해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진지왕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귀족들이 선덕여왕 시절 국정을 좌지우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하는 왕족일 뿐이었다.
하지만 김춘추의 정통왕족이라는 핏줄에 의한 정치력과 김유신의 군사력의 만남은 매우 큰 시너지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선덕여왕 말에는 왕이 여자라는 이유로 일어났던 비담의 난(647)이 일어났는데, 그 반란은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더 큰 기회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도와 난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김유신과 김춘추는 비담에 편에 섰던 방해세력을 제거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653년 3월,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에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자신은 660년 1월 66세의 나이로 신라 최고 관등인 상대등에 올라 김춘추와 자신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신라는 위로는 고구려가 옆에서는 백제가 압박을 하는 형국이었다. 때문에 신라의 숙원은 삼국 통일이었는데 김유신과 인맥의 황제 김춘추는 당과 연합을 해 우선 백제를 치기로 했다. 당과 신라는 7월 10일에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계백의 강력한 반항으로 인해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당의 장수 소정방은 이에 본보기를 보이려 선봉장 김문영 장군을 죽이려 했다. 이에 김유신은 소정방에게 그를 건드리면 백제보다 당과 먼저 결전을 치르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에 소정방은 기가 눌려 죄를 묻지 않고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 김춘추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문무왕은 아버지 김춘추의 유지를 이어받아 삼국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는 너무나도 강성해 신라도, 당도 감히 건드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사망(666년)하자 고구려는 내분이 일어나 국정이 어지럽게 되었고, 나·당 연합군은 668년 9월 손쉽게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김유신이 74세가 되어서야 김춘추와 같이 꿈을 꾸었던 삼국통일을 이룩해 낸 것이다. 비록 신라 혼자만의 힘으로 통일을 시킨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가장 국력이 약했던 신라가 강대했고 문화적으로 우수했던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선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무왕은 외삼촌 격이었던 김유신을 대각간을 넘어선 태대각간이라는 종래 없던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고 김유신은 이에 최고의 권력을 뽐내며 673년 조용히 사망했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삼국통일은 이 좁은 영토에서도 나누어져 있던 문화를 하나의 문화로 통합시켜 뚜렷한 국가 공동체를 만들어 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정복전쟁이 끝나면서 국력이 강해질 수 있게 되었고 정치와 경제가 안정이 되는 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하지만 통일 과정에서 외세의 도움을 받아 잦은 간섭을 받게 되었고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당에 뺏기는 등 (대동강~아산만이북) 커다란 오점을 남긴 통일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대박 통일은 이루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라는 같은 민족이면서 다른 국가를 가진 분단국가다. 대박 통일을 위해서는 그 통일의 주체성이 강력하지 않으면 신라 때의 당처럼 외세가 간섭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신라의 반쪽짜리 통일을 반면교사 삼아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통일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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