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이연선 pro]
▶ 장제스(장개석) (蔣介石)
▶ 출생-사망 / 1887.10.31 ~ 1975.4.5
▶ 국적 / 중국
▶ 활동분야 / 정치
▶ 주요저서/ 장중정전집
중국 정치가이며 만주사변 후 군벌을 이용해 중국 내 통일을 추진했지만 반대 세력에 밀려 결국 중국이 아닌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대만)을 지배한 장제스(장개석).
-중국 전통 사상을 배우며 키운 군사적 역량
장제스는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중국의 사상을 배우는 것과 더불어 영어와 과학 등 신교육을 받았다. 그러면서 군인으로서의 꿈을 키워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청나라를 타도해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군사 방면에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내다 혁명을 포부로 삼게 되었고 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4년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내기까지 했다.
-피어나는 군사 정치의 야망
장제스는 1926년 중산함사건을 계기로 국민당의 권력을 장악해 당 내 좌파(공산당)세력을 척결했다. 그런 후 장제스 주도하에 국민당은 중국 북부에 있는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해 북벌을 개시하였다. 그렇게 1927년 상하이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제거했으며 1928년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난징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이 되어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결국 국가 주석이 된 장제스는 만주사변 후 일본의 침공을 받게 되지만, '우선 내정을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방침을 세워 일본군의 척결보다는 오로지 국내통일에 매진하였다.
-위기를 돌파해 군 최고 권력자로
'내전정지(內戰停止) 일치항일(一致抗日)'. 내전을 멈추고 일본군에 대항하자며 장제스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졌고 결국 ‘장쉐량’ 군대에 감금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결과 장제스는 결국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으로 육/해/공군 총사령관의 책임을 맡고 전면적인 항일전을 개시하게 된다. 항일전쟁 중에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당 총재, 군사위원회 주석, 육·해·공군 대원수 등의 요직을 겸직하여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버리지 못하는 중국 통일의 꿈, 타이완에서 펼치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외세에 대항하던 장제스. 그러나 그는 중국 내부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다시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내전을 개시하였다. 내전 초 장제스는 우세하였으나 1949년 12월 반대 세력과 여론에 의해 완전히 쇠퇴해 본토로부터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제1권력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유대를 강화해 중화민국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타이완을 지배하였다.
-독재자라는 평가 뒤, 대한민국 독립 공헌
중국 내에서 타이완으로 권력 장악의 꿈을 옮겨야 했던 장제스. 그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우리에게는 일제 치하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독립을 위해 지원하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에 큰 조력자가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그의 업적 역시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함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결국 한국에 들어선 미국에 의해 장제스는 배제되고 말았다. 하지만 195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기도 한다. 그 후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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