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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인포그래픽] 자유로운 영혼 가진 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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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김지영 / 디자인 이연선]

▶ 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
▶ 출생-사망 / 1877년 5월 26일 – 1927년 9월 14일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무용가

미국 출신의 현대무용가. 전통 발레처럼 엄격한 형식과 현란한 기술에 의존하는 무용에 반발하며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력을 강조한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손꼽히고 있다.



- 파산한 은행가의 딸, 하지만 시·음악과 늘 함께했던 그녀

이사도라 던컨이 태어나던 해,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던컨 은행이 파산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파산과 수많은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살았고 이사도라는 어머니와 살며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소리로 글을 읽어주었다.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휘트먼의 시들은 이사도라 스스로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녀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 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다

이사도라는 대표적인 무용이었던 발레에 대해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멀리했다. 때문에 발레 일변도였던 그 시기에 그녀는 정식으로 무용을 배울 수 없었지만, 그녀의 무용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은 발레가 아닌 그녀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도라 던컨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자신의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무관심과 몰이해,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이사도라는 어디서나 춤을 췄다. 그녀는 런던과 파리에 머물 당시 박물관에 매료되어 박물관에서 그림 속 춤추는 동작을 따라했다. 그리고 그녀는 니체, 베토벤, 쇼팽 등에도 매료돼 춤을 추면서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사도라는 춤을 출 때 뭔가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격식을 차리던 당시 예술계에 논란을 일으켰지만 얼마 되지 않아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사도라 인생의 가장 큰 슬픔

이사도라는 당대의 천재적인 남자들과 뜨겁고도 짧은 사랑을 했다. 그녀는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두 아이를 혼자 키우던 이사도라는 아이들과 보모와 함께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이때 아이들이 탄 자동차가 사고로 인해 강으로 떨어지게 됐다.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땐 이미 아이들과 보모가 싸늘함 주검이 된 뒤였다. 그 뒤로 이사도라는 센 강변을 울부짖으며 뛰어다녔다고 한다.

- 금발의 천재시인 예세닌과의 악몽 같은 결혼생활

아이들이 죽은 뒤 러시아로 떠난 이사도라는 ‘예세닌’이라는 천재 시인을 만나게 된다. 이사도라와 예세닌은 열여덟 살 차이가 났는데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신고를 한다.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사랑했고 그녀와 예세닌 사이에는 금발의 아들 패트릭이 생겼다. 두 아들을 잃었던 이사도라는 패트릭 때문에 예세닌에 대한 사랑도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과는 달리 예세닌은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리며 술에 취하면 이사도라를 험담하고 폭행하였다.  

-삶의 내리막길 끝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다

예세닌과 함께 유럽을 떠나 미국 순회공연에 나선 이사도라는 술과 연습 부족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로 갔던 그녀에게 미국대중은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라며 홀대했다. 게다가 미국에서 관계가 더욱 악화된 이사도라와 예세닌은 결별하게 되었는데 예세닌은 30살의 나이에 이사도라와 함께 신혼생활을 했던 호텔에서 자살을 한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삶의 고달픔에 시달린 채 늙고 뚱뚱해졌으며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력을 잃고 말았다. 이후 이사도라는 프랑스 니스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가다 차 뒷바퀴에 그녀의 스카프가 걸려 질식사하고 만다.


이사도라는 젊은 시절,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돈이라면 가난에도 거부할 줄 알았고 있는 그대로의 신체 동작을 숭배했으며 예술을 사랑했다. 그녀는 살아생전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했다. 고단한 삶을 살며 추문과 비극을 겪었지만 그녀의 영혼만큼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으며 이는 그녀의 자유로운 춤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