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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인포그래픽] 근현대 페미니즘 꽃 피운 일본 신여성 ‘히라쓰카 라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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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심재민 / 디자인 이연선]

▶ 히라쓰카 라이초
▶ 출생-사망 / 1886.2.10. ~ 1971.5.24.
▶ 국적 / 일본
▶ 활동분야 / 근대 여성인권운동가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여성의 능력은 발휘되고 있다. 그런데 불과 수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의 의견은 묵살되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재처럼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기 까지 많은 인권 운동가의 외침이 있어 왔고 그 중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운동가가 있었기에 오늘의 지금의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여성중 하나 일본의 ‘히라쓰카 라이초’이다.



-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대한 반발
히라쓰카 라이초는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자를 잘 보필하고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여성으로서 가치 있는 삶이다’라는 여성관을 가르치던 한 명문여고를 다니며, 이에 반발심이 생겨 여성 운동가로서의 사명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라이초는 여자에게 높은 학벌은 필요 없다는 부모의 만류를 뒤로 하고 일본여자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 운명을 바꿔 놓은 사랑
히라쓰카 라이초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을 겪게 된다. 당시 라이초는 일본 최고의 엘리트 유부남 모리타와 연인관계였다. 하지만 라이초는 모리타를 사랑의 대상이 아닌 탐구의 대상으로 여겼고 반면 모리타는 라이초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모리타는 그런 라이초의 태도에 극심한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어느 날 라이초에 동반자살 여행을 제안 했다. 누구나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그녀의 제안. 그러나 라이초는 그런 모리타의 극단적인 제안에 더욱 흥미를 느껴 수락하게 되었고, 둘은 온천으로 떠나게 된다. 물론 라이초는 전혀 자살을 할 생각은 없었다.

- 하나의 사건 성별에 따라 갈리는 시선
일본 최고의 엘리트 모리츠와 라이초의 동반 실종에 가족들은 신고를 했고, 그 자체로 큰 이슈가 되어 각종 신문과 뉴스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둘을 향한 보도의 시선이 사뭇 다름에 라이츠는 충격을 받았다. “앞길 창창한 유부남 유혹한 마녀” “색광녀” 등 자극적인 타이틀이 모두 여성인 라이츠 이름에 따라 붙을 뿐 모리츠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모리츠는 대학교 졸업 명부에서 삭제되었고, 고위 관료이던 그녀의 아버지는 직장을 잃어야 했다. 같은 사건이지만 성별하나로 갈린 결과. 억울하고 좌절의 상황들이지만, 오히려 그녀는 냉정함을 유지한 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생각을 넘어 적극적인 사회 운동가로의 변모
위 사건을 겪으며 라이초는 세상의 시각이 어떠하든 자신 스스로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세상에 뿌리박힌 남성 주의 사상이 여성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사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냄으로써 남성주의 사상을 철폐하고 남녀가 평등하다 것을 관철하고자 했다. 라이초는 그 시작으로 여성잡지 <세이토>를 발간하게 된다.

- 일본 페미니즘의 상징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세이토> 창간식에서 라이초가 연설한 대목 중 하나로 이 말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면 일본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세이토의 출간으로 여성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단체가 되었고 그들은 여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한국에도 미쳐 나혜석, 김일엽 등 운동가를 중심으로 한 한국 근현대사 페미니즘의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렇게 <세이토>와 그를 중심으로 한 여성해방운동 단체는 여성의 평등을 요구해 나가기 시작하며 페미니즘을 확산시켜 나갔다.

- 핍박 속에도 지지 않는 페미니즘의 꽃
이처럼 세이토와 페미니즘 단체의 영향력이 커지자, 기존 남성 중심의 사고에 젖어 있는 단체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라이초는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협박에 시달려야 했고 가는 곳마다 비난을 피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1916년 <세이토>는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에 의해 폐간되고 만다.

그러나 라이초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더욱 왕성한 페미니즘 활동을 이어나갔고 ‘신부인협회’ ‘일본부인단체연합회’ ‘국제민주부인연맹’ 등의 직책을 맡아 더욱 포괄적인 여성 인권 신장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등하게 여성의 인권이 인정되고 보장받는 사회를 그리며 활동을 놓지 않았던 라이초는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라이초를 비롯한 운동가들이 근대화 시대 혹독한 여성인권 신장 운동을 펼친 덕에 ‘신여성’이라는 개념의 현대 여성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차츰 후대로 이어져 현재에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지구촌 곳곳에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 시작에 히라쓰카 라이초가 있었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