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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한국사

[키워드 한국사] EP.31 백성들이 ‘나무아미타불’염불을 외우기 시작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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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불교는 신라 초기에는 토속신앙에 밀려 박해를 받고 있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 전파되기 시작 했다. 불교에는 호국사상이 있었는데,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곧 왕을 지킨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더욱 발전하여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통일신라에는 많은 고승들이 있었다. 원측은 모든 현상이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는 불교사상인 유식을 전파시켰고 이는 불교 교학의 한 종파인 법상종으로 발전하게 됐으며 의상은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화엄종을 창시했다.

그리고 대표적 고승인 원효는 661년에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중 배를 타러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던 길에서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 왔다. 여기서 유명한 해골 물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효는 잠을 자다 목이 말라 잠결에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깨고 보니 그 물이 해골이었다는 것에 구역질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이하여 어제는 달디단 물이었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내 마음일 뿐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일심(一心)사상(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기초하고 있고 마음이 모든 존재의 근거라고 파악하는 사상)을 깨닫고 법성종을 창시하였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뒤에는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부처와 보살이 거주하는 땅)에 이를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누구나 성불(부처가 되는 것)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에 신라의 백성들은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

또한 통일신라 대에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워졌다.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 남록에 창건된 불국사는 처음에는 수십 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목조건물이 완전히 타 버려 소실되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경주 토함산 자락 깊숙한 곳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있는 석굴암은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미술품 중 하나다.


이처럼 통인신라시대에는 왕권 강화의 필요에 의해 불교가 발전되었지만 원효에 의해서 대중들에게도 불교가 폭넓게 전파된 시기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서 불교문화는 찬란하게 꽃피워 불국사와 석굴암처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문화재를 만들기도 했다. 같은 불교를 믿지만 왕족과 귀족은 다음 생에서도 같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현세를 벗어나기 위해 믿었다는 것이 슬픈 시기이기도 했다.